매니페스토디자인랩, 좌충우돌 두 건축가의 물건 만들기

다시 태어나면 건축가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활자를 매개로 한 지금의 삶도 의미 있지만, 재료의 물성을 정확히 이해하고 각각의 배치를 설계하여 눈앞에 무언가를 세우는 건축은 또 다른 매력으로 다가왔다. 글과 집(건축) 모두 ‘짓다’라는 동사를 취한다는 점도 건축에 관한 막연한 애착이 가는 이유였다. 공간을 통해 인간의 행위에 어떠한 맥락을 만들어가는 것. 생각만 해도 참으로 설레지 않는가. 

여기 다시 태어나도 건축을 하고 싶다는 두 명의 건축가가 있다. 그런데 그들은 한편으로 수저나 자전거 거치대 같은 물건을 만든다. 왜일까? 매니페스토 건축사무소, 매니페스토 디자인 랩의 공동대표 안지용과 이상화. 세계 유수의 어워드에서 수상한 이력들, 뉴욕과 서울을 오가며 쌓은 화려한 경력들, 이제는 TV 방송까지 그 영역을 넓히고 있는 분주한 매니페스토의 일상을 걷어내고 나니, 그 중심에는 다름 아닌 ‘사람’이 있었다. 그들의 시선이 큰 숲에서 그 안의 나무로 이동한 이유는 바로 이것이었다.

진생치킨이 하나의 선언이 되기까지

소년 안지용. 어릴 적 과학자가 꿈이었던 이 소년은 로봇 태권 V, 마징가 Z를 본 날이면 어김없이 스케치북에 과학자가 있는 장면을 그렸다. 꽤 흔한 이야기다. 로봇의 조종사, 아니면 그것을 만드는 과학자. 소년의 로망이란 흔히들 이렇게 두 부류로 나뉘곤 하니까. 그러나 안지용은 조금 달랐다. 그는 인물보다는 플라스크가 빼곡하게 놓여 있는 책상이나 실험실 같은 과학자의 ‘공간’을 집요하게 반복해서 그렸다. 로봇이 만들어지고 다양한 실험들이 펼쳐지는 ‘공간’은 소년 안지용에게 과학자를 설명하는 가장 중요한 단서였다. 공간이 품고 있는 맥락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던 것은 아마 이 때부터였을 것이다. 

소년 이상화. 우주인이 되고 싶었던 그는 중학교 시절 해마다 열린 제도대회에서 2년 연속 우승을 차지했다. 새하얀 백지에 공장 부품 같은 것들을 입체적으로 그려나가는 일이 그에게는 꽤 수월했고, 흥미로웠다. ‘커서 건축 하면 되겠다’라는 선생님의 이야기는 그의 유년시절을 무의식적으로 지배했다. 그로부터 몇 년 후, 마치 정해진 수순처럼 그는 자연스럽게 건축학도가 되었다. 

과학자가 꿈이었던 소년과 우주인이 되고 싶었던 소년은 각각 건축가가 되어 뉴욕이라는 흥미로운 시공간에서 조우했다. 어째 잘 어울리는 조합이다. 건축가는 때로 로봇만큼이나 정밀하고 우주만큼이나 신비로운 건축물을 만들어내지 않던가. 그들은 2008년 뉴욕 23가에 위치한 조그만 사무실에서 회사를 차리자며 의기투합했고 어느덧 6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공약, 선언이라는 묵직한 이름의 매니페스토(Manifesto)로 회사 이름을 바꾸기 전, 그들의 첫 회사명은 ‘진생치킨(Ginseng Chicken)’이었다. 2008년 8월, 의기투합할 당시 함께 먹었던 음식이 삼계탕이었기 때문. 이 즉흥적이고 장난스러운 듯한 이름에는 나름 ‘진지한’ 의도가 담겨 있다. 서양 사람들이 즐겨 먹는 저렴한 식재료인 닭과, 인삼이라는 동양의 고급 식재료가 만나서 삼계탕이 만들어지는 과정이 마치 자신들이 살아온 과정 같았던 것. 그들은 뉴욕이라는 도시에서 다양한 양극의 개념들을 통해 새로운 가치를 탄생시키고자 했다. ‘진생치킨’이라는 이름은 이러한 철학을 담은 일종의 상징이었다. 

“미국에서 건축회사 등록을 하는데 처음에는 이름 때문에 거부를 당했어요. 건축과 음식은 관계가 없을 뿐 아니라 너무 장난스럽다는 게 이유였죠. 장문의 편지를 두세 번 보냈던 기억이 나요. 저희의 태생적, 문화적 베이스 안에서 진생과 치킨이라는 두 개념이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지에 관한 내용이었죠. 음식과 디자인의 프로세스가 유사성이 있다고 계속 설득한 끝에 결국 ‘진생치킨’으로 등록할 수 있었어요.”

이 특이한 회사명은 생면부지 두 이방인 건축가를 각인시키는데 효과적이었다. 일종의 노이즈 마케팅이었던 셈이다. 프로젝트를 해가는 일련의 과정들이 결국 그들의 생각을 정리해 하나의 선언으로 만드는 것이라는 생각에 진생치킨이라는 이름은 1년 반 후 매니페스토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돌이켜보면 그 당시 진생치킨 역시 하나의 선언이었다고 말하는 그들. 그렇게 정리된 선언들이 모여 지금의 매니페스토의 아이덴티티를 구축하고 있는 셈이다. 

안지용 대표는 건축 디자인의 범위는 비단 ‘건물’ 하나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디자인 철학을 가지고 있다. 그는 도시디자인은 ‘숟가락 길이’에서부터 정의될 수 있다고 말한다. 숟가락이 길면 식탁의 폭도 달라지고, 방의 너비에 영향을 주며, 나아가 건물의 규격이 달라져 도시의 모습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니 합리적인 틀 안에 사람을 담아 그의 동선을 기획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관찰하고 그들의 생활을 면밀히 관찰한 후 그에 합당한 아름다운 질서를 만들어가는 집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시적인 관계에서부터 거대한 문제의 실마리가 풀리는 그런 경험을 누구나 한 번쯤은 해봤을 터. 이것은 그들이 매니페스토 건축사무소 외에 매니페스토 디자인 랩을 만든 결정적 이유였다.

사람을 중심에 둔 매니페스토 프로젝트

자, 그럼 본격적으로 매니페스토 디자인 랩의 프로젝트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이들의 이름을 검색해보면 한 방송사에서 진행했던 프로그램 ‘K-DESIGN 서바이벌’의 심사위원 기사로 더 많이 등장하지만, 국내에서 매니페스토 디자인 랩의 인상을 강하게 남긴 작업은 역시 신개념 자전거 거치대 ‘바이크 행어(Bike Hanger)’다. 2011년 광주디자인비엔날레 출품작이기도 한 바이크 행어는 사람들이 페달을 돌리는 힘을 동력 삼아 완성되는 친환경 자전거 거치대다. 이 제품 앞에 ‘친환경’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이유는 도시의 버려진 공간들을 활용했다는 것과 동시에 대체 에너지조차 사용하지 않는 온전히 사람의 힘을 활용해 움직이는 도시형 자전거 거치대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맨 처음 이 제품을 보았을 때 마치 하나의 거대한 설치예술품을 보는 듯했다. 형태는 아름다웠고, 개념은 재기발랄했다. 

안지용, 이상화 대표는 ‘사람이 자전거를 타는 본래의 취지를 살려 거치대를 디자인하자’는 이념으로 디자인을 시작했다고 말한다. 활용도가 많지 않은 건물 외벽에 설치하는 이 타원형 거치대는 30여 대의 자전거를 보관할 수 있다. 일종의 주차타워를 생각하면 되는데 사람의 힘으로 작동된다는 것이 흥미로운 지점이다. 아래쪽에 달린 자전거 형태의 페달을 밟으면 행어가 돌아가 자기 자전거를 찾을 수 있다. 2012 베니스 비엔날레 후보, 2012 Modern Atlanta 초청, 100% Design London 등 세계 곳곳의 디자인 전시에 참가했다. 

“바이크 행어는 건축을 건물에 초점을 두었던 것에서 벗어나, 건물과 건물 사이의 공간, 사람이 이용하는 행위, 환경 요소, 사회적 변화 등의 다양한 관점을 연구하고 그것이 재미있게 실현된 프로젝트였어요. 비록 엄청난 초기 투자 비용이 들긴 했지만요” 

회사를 알리는 마케팅에는 혁혁한 공을 세웠으나 가장 많은 적자를 안겨준 프로젝트가 바이크 행어였다면, 큰 부담을 갖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회사에 지속적인 이윤을 준 제품으로는 허버웨어(Hoverware)를 꼽을 수 있다. 이 역시 사람과 환경, 그리고 재미가 결합한 그들의 자발적 프로젝트였다. 

점심시간, 다 같이 둘러앉은 식당 테이블을 떠올려 보자. 일단, 막내로 보이는 사람이 제일 먼저 냅킨을 하나씩 뽑아 사람들 앞에 놓는다. 수저를 놓기 위해서다. 요즘에는 냅킨의 형광물질이 테이블보다 비위생적이라는 의견도 있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이 수저 받침용으로 냅킨을 쓱쓱 뽑아든다. 하지만 이렇게 수저받침대로 쓰인 냅킨은 고스란히 쓰레기가 되는데 여기에 새로운 솔루션을 제시한 제품이 바로 허버웨어다. 공중부양 숟가락이라고 불리는 이 제품은 입에 들어가는 부위가 바닥에 닿지 않도록 디자인되어 있다. 2012년 굿 디자인 어워드, 2013년 레드닷 어워드를 수상한 이력을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그 형태만으로도 무릎을 치게 하는 그런 제품이다. 허버웨어는 독일과 한국에서 판매되기 시작했고, 얼마 전 뉴욕 모마(MoMA)와 MAD에서도 연락을 받았다고. 

“뉴욕 23가에 있었던 사무실에서는 매일매일 아이디어가 쏟아져 나왔어요. 일이 많지 않으니까 이런저런 공상을 많이 했던 시기였죠. 그때 ‘중력을 이용해서 숟가락을 띄울 수 있을까?’ 하는 이야기에서부터 시작된 프로젝트에요. 실제로 그런 제품이 있었는데 여러 가지 결함이 있었죠. 그래서 숟가락을 구부리면 어떨까 생각했어요. V자로 구부렸더니 그 사이가 지저분해지는 단점이 있었죠. 고민하던 중 대나무에 있는 마디 지점을 이용해서 숟가락을 띄워보자고 아이디어가 발전한 거예요.” 

처음, 나무로 제품을 디자인하자는 아이디어가 나왔을 때 전국 방방곡곡을 뒤지며 나무를 다룰 수 있는 장인을 찾아 다녔다. 제품을 디자인하면 실제로 이 제품들이 어떻게 구현될 수 있는지 프로세스 및 라인업을 조사해주는 회사들이 있는데 세 군데까지 의뢰했는데도 한국에서는 불가능하다는 연락을 받았다. 마지막으로 담양까지 내려가서 장인들을 수소문한 결과 대부분 중국으로 넘어가고 한두 명 남은 장인들에게는 공예의 개념으로만 제품을 의뢰할 수 있었다. 한 달에 제작할 수 있는 수량이 현저히 적었고, 제품 가격 역시 2~30만 원을 훌쩍 넘겨야만 가능한 구조였다. 예술품의 개념이 아닌, 일상에서 사용되는 제품을 원했던 그들에게는 적합하지 않은 제작방식이었다. 결국, 지인 소개로 인도네시아 장인들을 소개받았고 현재는 그곳에서 100% 수작업으로 허버웨어가 생산되고 있다. 

“허버웨어를 만들면서 우리나라의 제조업의 한계를 여실히 목도한 기분이었어요. 한국에 더 이상 장인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결국 제조업의 허리가 없어지고 있다는 것과 같은 말이잖아요. 제조라는 것은 산업기술과는 다르게 한 번 끊기면 다시 복구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 들었어요. 장인들의 기술은 전수되지 않는 이상 복제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죠. 그 규모가 크든 작든 생태계가 생존하는 것은 중요한 일인 것 같아요. 아예 없다는 사실은 조금 충격적이었어요” 

소생공단에서 중요하게 품고 있는 의도 중 하나가 매니페스토 디자인 랩의 인터뷰에서 흘러나왔다. 생각해보면 제조산업의 쇠락 원인을 단순히 수요 감소로만 보는 것은 어폐가 있다. 다양한 공정이 수반되는 제조는 결국 각각의 공정을 링크할 수 있는 네트워크가 필요하고 이를 엮어서 완성된 제품을 생산할 수 있는 라인업까지 튼튼하게 살아남아야 계속 이어질 수 있는 것이다. 네트워크가 부족했던 제조산업은 결국 수요와 공급의 선을 잇지 못한 채 그 시작점을 하나 둘 잃어가고 있다. 동대문의 봉제공장도, 소공동의 테일러샵들도 그렇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지금이지 않은가. 

사실, 건축할 때는 깊이 인식하지 못했던 단면이었다고 그들은 고백한다. 이상화 대표는 오히려 너무 큰 스케일만 생각하다가 작은 스케일에 집중해보니 전혀 다른 세상이 열렸다고 덧붙였다. 재료의 속성에 관해서도, 그 재료를 다루는 사람들에 관해서도, 또한 그 재료를 사용하게 될 사용자에 관해서도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게 되고 그 원리를 탐구하게 된 것이다. 매니페스토 디자인 랩에서 진행하는 프로젝트들은 ‘물건’을 단서 삼아 생각의 깊이를 더해줄 수 있는 계기를 그들 스스로 만들어가는 과정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들은 고스란히 그들의 건축에 영향을 미치는 선순환의 고리가 되어주고 있었다. 말하자면 숟가락을 만들기 때문에 그들은, 더 멋진 집을 지을 수 있을 것이다. 

오늘도 매니페스토 디자인 랩의 시선은 사람들에게로 향한다. 얼마 전 회사 로비에 놓은 테이블의 높이가 너무 높은 것 같다며 하루에도 몇 번씩 오가는 사람들을 앉혀보고, 작업실 테이블의 모서리를 유심히 관찰하다가 적합한 모서리의 각도에 관한 토론을 시작하기도 한다. 매니페스토 디자인 랩의 사람을 향한 관찰과 누적된 경험이 우리의 삶에 어떠한 해법을 던져줄지 기대된다. 사람을 중심에 둔다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은 요즘이어서 더욱 그렇다.


글 김선미 · 사진 김규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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