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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퇴적공간』이란 책이 출간됐다. 탑골공원과 종로 일대를 돌며 노인들의 삶을 추적해낸 일종의 현장연구 보고서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노년이란 강의 상류로부터 떠밀려 내려 하류의 ‘퇴적공간’에 쌓인 존재들이라고 얘기한다.
문화로놀이짱은 ‘사물’의 퇴적공간에 주목한다. 쓸모 없어지고 버려진 것으로 치부되는 물건들을 찾아내어 숨결을 불어넣는다.
하지만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폐목재를 가지고 가구를 만드는 사회적 기업’으로 놀이짱을 설명하기에 그들의 활동은 소박한 듯 거대하고, 분명한 듯 애매하다.
물건이 쌓이고 이야기가 쌓이고
상암 월드컵경기장 서쪽, 옛 석유비축기지에 자리잡은 놀이짱은 작은 콘크리트 건물과 몇 동의 컨테이너박스로 이루어져 있다. 창고 안은 역시 폐목재와 별의별 물건들로 가득했고, 작업장은 놀이짱 식구들로 꽤나 북적댔다.
홍대앞에서 놀면서 성장한 문화기획자 아랑이 대표로 중심에 있고, 건축을 하다가 제주에 내려가 목공을 배우고 온 필섭, 어렸을 때부터 목수가 되고 싶었지만 소질이 없어서 엄두를 내지 못했던 사회학도 아름, 제품디자인을 전공했지만 몸으로 하는 노동을 찾아서 들어온 정석, 그리는 것이 좋아 이름이 ‘그리고’인 그리고, 전남 부안에서 태어나 변산공동체에서 청소년기를 보내고 이제 겨우 도시생활에 적응하기 시작한 막내 아루 등 다양한 경력과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있다. 서로 다른 길에서 출발한 이들이 오래된 목재를 붙잡고 모여 하고 싶은 일은 뭘까?
폐목재와 이러저러한 물건들은 다 어디서 어떻게 이곳에 오게 되나요?
그리고: 보통은 마포구 일대 가정집에서 연락이 오면 목재 상태를 확인하고 수거를 합니다. 가수 싸이 공연이나 부천의 영화 세트장처럼, 공연이나 전시가 끝나고 버려지는 자재들도 종종 대상이 되지요. 요즘은 철거하는 집을 우연히 만나 방문, 창틀, 문틀을 신나게 수거하는 일이 많아졌고요. 오며가며 거리에서 산에서 채집하는 경우가 확실히 늘어났지요.
제일 기억에 남는 것은 여의도 성모병원에서 쓰던 약장인데, 놀이짱 멤버가 진찰받으러 갔다가 우연히 폐가구를 목격하고 문의를 한 것이 인연이 되었죠. 병원 리뉴얼 때마다 1톤 트럭 가득 수거를 해옵니다. 한번은 초등학생이 쓰던 침대 프레임을 수거한 적이 있었는데, 아이가 침대와 헤어져야 하는 게 못내 서운한지 한참 신경전을 벌이던 일도 기억에 남아요.
마침 필섭이 가져온 ‘쫄대’가 얘깃거리가 됐다. 집앞에 버려진 칠판에서 뜯어온 거란다. 작업실엔 각종 재질의 쫄대 컬렉션이 한 바구니다. 아름은 이 정도면 ‘쫄대 페티시’라며 놀려댄다. 그러는 아름 자신은 얼마 전 깨진 유리조각으로 찬장 문을 만들면서 ‘정말 별걸 다 재활용하고 있구나’ 싶었다. 병원에서 수십 년 머물렀던 책장, 어느 가정집에서 온 침대, 산에서 길에서 만난 오래되고 사연 많고 흠집 있는 잡동사니들이 매일같이 이곳을 들락거리며 물건이 쌓이고 이야기가 쌓인다.
필섭: 목공방을 다닌 적이 있었어요. 거기선 새 나무를 사용하는데 흠집이 나면 대패질을 해서 그 흔적을 없애야 했죠. 우연히 난 상처를 그대로 두고 싶었지만 그래선 안 됐어요. 때로는 흠집이 의미나 해법이 되기도 하는데 안타까웠죠. 너무 공들여 만드는데다가 재료까지 새것이니까 결국 만들고도 아까워서 잘 쓰지도 못하더라고요.
아랑: 사실 ‘재활용’을 하게 된 건 결핍 때문이었어요. 없으니까 고쳐 쓰고, 고쳐 쓰면서 시간이 쌓이고 변화되고, 그렇게 생긴 농염함이 사람이나 물건을 매력적으로 만드는 것 같아요. 그런데 쓰레기 소각장에 가면 이 녀석들을 한꺼번에 차로 밀어 넣어버려요. 기분이 묘했죠. 그때부터 재료가 다시 보이기 시작했고, 내 마음속에도 소생하는 기운이 생기기 시작한 거 같아요.
독립생활자를 위한 가볍고 변형 가능한 가구
놀이짱은 그동안 주로 공공기관의 인테리어나 축제, 캠페인을 위한 공간연출 등을 맡아 주문제작을 해왔다. 그리고 이제 일반소비자를 대상으로 한 자체 상품도 개발하기 시작했다.
아름: 처음 생각한 건 독립 생활자를 위한 가구였어요. 좁은 집에서 혼자 사는, 궁상맞은 사람들을 위해서, 가볍고 이동이 쉽고 변형도 가능한. 이사비용도 아낄 수 있도록 말이지요. ‘스툴&티테이블 사이’란 제품이 있어요. 세우면 스툴인데, 누이면 작은 테이블이 되어서 차나 밥을 대접할 수 있죠.
테이블 상판은 길게 쪼개진 목재를 집성해서 만들어요. 폐자재로 가구를 만드는 만큼 면으로 된 판재를 구하기가 쉽지 않으니까요. 처음에는 질 좋게 집성을 해서 하나의 면으로 보이게 만드는 것에 주목했어요. 하지만 지금은 오히려 거칠게 만들어보기도 하고, 색을 칠하거나 불에 탄 목재를 그대로 살려서 멋을 내보기도 하고, 그러면서 집성 자체가 놀이짱 가구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어딘가 파손되거나 잘못된 물건에서 우연한 발견이 이루어지고 그래서 더 재미있어지는, 그게 놀이짱 물건의 정체가 된다. 자체 개발 제품 목록엔 가구 외에 트레이와 거울, 냄비받침 같은 소품들도 들어있다. 특히 냄비받침은 여러 멤버들이 제각기 참여하여 각자가 자기 스타일대로 만들어내기 때문에, 공동체 노동의 한 면을 보여주는 흐뭇함이 담겨 있는 물건이기도 하다.
아름: 주문제작을 할 때는 시간에 맞춰야 하니까 재료에 굴복하면서 작업을 한다면, 자체상품은 재료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형태에 주목하고 있지요. 디자인이 나오면 숙련도에 따라 일을 나누어 참여하는데 놀이짱 식구들 너나 할 것 없이 다 같이 하기 때문에 ‘떼 작업’이라고 불러요. 자재를 다듬고 조립하고 도료를 칠하고…. 작업이 완료되면 모두들 호들갑을 떨면서 1톤 트럭에 물건을 싣는데 이것도 잘하는 멤버가 따로 있지요.
작업장, 그리고 제작학교
흔히들 놀이짱을 ‘폐목재를 가지고 재활용 가구를 만드는 회사’로 인식하고 있는 것 같아요. 출발은 홍대앞에서 문화기획, 문화예술교육이었고…. 그사이에 정체성의 변화가 있었던 것인가요, 아니면 우리의 이해가 부족했던 것인가요?
아랑: 예전부터 저는 사물이 삶의 방식을 바꾼다고 생각해왔어요. 우리에게 공급되는 사물들을 보면 필요에 대한 욕망까지 조율하고 있잖아요. 반면에 스스로 욕망을 찾아 스스로의 삶을 디자인하며 살아간다고 한다면, 그때 필요한 사물은 뭘까, 그걸 또 우리 스스로가 만들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실현할 수 있는 장이 작업장, 공방이라고 생각했어요. 기존의 상품에 대해 거리를 둬 보고 스스로 생산하는 과정 안에서 나의 소비방식을 진단해볼 수도 있고,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대한 입장을 정리해볼 수 있는 공간, 그게 우리가 생각하는 작업장이었지요. 그래서 공간을 만들고 나니까, 스스로 굴러가려면 생산을 해야 하더군요. 그래서 재활용 가구가 나오게 됐고요.
이쯤에서 공공성을 표방하면서 교육활동에 치중해 비슷한 모델을 여러 지역에 재생산하는 쪽을 택하거나, 제작소로서 입지를 다지는 쪽을 택해 어느 한 쪽에 집중할 수도 있었을 거예요. 하지만 어렵사리 양자를 함께 끌고 가는 것을 택했죠. 이야기와 생산이 통합되어 하나의 완결성을 이루는 걸 보고 싶었거든요.
그렇다면 지금의 정체, 혹은 지금 집중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아랑: 제작학교를 시작했어요. 놀이짱에 늘 아낌없는 조언을 주시는 미학자 임정희 선생님의 제안이었는데, 생활기술을 매개하는 복합적인 제작소가 되게 만들어보자는 것이지요. 놀이짱이 작동되는 원리를 보면 일종의 인생학교 같거든요. 기술 습득이나 인력 양성을 공식적으로 표방하진 않지만 끊임없이 뭔가 배우고 성장하는 일종의 학교 같죠.
생활기술들을 배우고, 그것을 가지고 사회문화적으로 필요한 산물도 만들고, 기본적인 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비용도 줄여나가고. 우리를 지지 지원하는 사람들과의 더 강하고 큰 네트워크 안에서 우리의 산물들이 순환될 수 있도록 생활재 전반을 공급할 수 있을 정도의 제작소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공뿐 아니라 철공, 직물, 작물, 그리고 공공영역 안에서 놀이기구를 만든다거나 하는 식으로 장르를 넓혀가려고 해요.
아울러 ‘제작인문학’이 중요하다는 인식을 하고 있어요. 세상의 순환체계를 이해하고 자연과학적인 사고를 갖게 하는 과정이지요. 우선 우리 스스로 그런 공부를 하고 있는데, 실제 제작 일을 수행하는데 큰 영향력을 느낍니다. 그러니까 제작학교, 제작인문학교, 제작 일을 연결시키는 것, 이것이 우리의 계획이고 우리가 지금 집중하는 것입니다.
10년이라는 시간을 통과하면서 놀이짱은 쉬지 않고 스스로에게 시대적 과제를 부여하면서 조금씩 변모하고 그것을 동력으로 버텨온 것일까. 성공하는 비즈니스를 위한 분투였든, 탈선한 또는 밀려 내려온 퇴적의 공간, 잉여의 공간에서 만들어진 이벤트였든, 이제는 연민 대신 조심스럽게 드물 ‘희’ 자 희망을 꺼내어도 좋지 않을까.
아름: 난 놀이짱이 아주 트렌디하다고 생각했어요. 놀이짱의 슬로건이 ‘소비에서 생산으로, 소유에서 공유로’입니다. ‘소비’와 ‘세대론’을 접목하고 20대의 자립을 소비에서 공유로 연결지은 것은 시기적절했다고 봐요. 제가 놀이짱에 들어온 지는 3년밖에 안 됐지만 지켜본 지는 꽤 오래 되었는데, 거의 해마다 태도랄까 성격이랄까 계속 달라졌지요. 저는 그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글 백현주 · 사진 김규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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