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세라, 그녀의 요지경 속으로

세상을 어지럽게 하는 것들은 지뢰밭의 지뢰처럼 곳곳에 깔렸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고 말했던 사람들은 아무도 모르게 자취를 감췄다. 그래도 우리가 삶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누구나 가진 일상의 틈이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 각자의 맛과 멋대로 채워 놓은 틈은 잠시 쉬어가는 휴게소 같은 곳이다. 어느새 가득찼던 그 틈이 박세라를 만나 또 비워지고 새롭게 채워졌다.

이름의 한자는 세상 ‘세(世)’, 비단 ‘라(羅)’를 쓰신다고 들었어요. 한자를 몰랐을 때와는 다른 느낌이에요. 어느 분이 지어주셨나요?

맞아요. 다른 느낌이에요. 외할머니께서 직접 지어주셨어요. 저는 제 이름이 주는 여성스러움을 좋아하지 않아서 한자를 강조했었어요.

영문 이름의 이니셜인 PSR의 조합도 예뻐요.

대학생 때 혼자 극장에서 영화 <수면의 과학>을 봤어요. 주인공인 스테판이 강의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때 ‘PSR’에 대해 이야기해요. 평행적(Parallel), 동시적(Synchronized), 임의행동(Randomness), 그러니까 사람이 동시에 하는 행동에서 엇갈리는 순간에 대해서요. 그 순간 어두운 극장 안에서 노트를 꺼내 들고 휘갈겨 적었어요. 감독의 의도를 다르게 이해했을 수도 있지만, 개념적인 부분에서 많이 공감했어요. 가령 내가 이곳에서 한 어떤 행동이 어디선가 영향을 받을 수도 있다는 거죠. 당시에는 ‘PSR’을 어떻게 사용하겠다는 계획은 없었고, 작업할 때는 제 이름보다 PSR을 선호했어요. 본격적으로 작업을 시작하면서 PSR의 의미처럼 평행적이면서 동시적, 임의적인 것들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되었고요.

이름도 영화도 운명일 수 있겠군요. PSR은 박세라가 사용하면서 의미가 더 커졌을 테니까요. 그렇다면 PSR을 만들기 전에는 어떤 일을 하셨었나요?

대학을 졸업하기 전에 디자인 문구 회사에 취직했어요. 규모가 큰 회사는 아니었기 때문에 인쇄부터 제작까지 모든 공정을 경험해 볼 수 있었죠. 어쩌면 지금의 제품들을 제작하는데 기반이 되는 것 같아요. 당시 공부를 지속하기로 결정하면서 회사는 정리했어요.

회사를 그만 둔 박세라는 모아 놓은 돈으로 유럽 여행을 선택했다. 여행의 목적은 휴식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대학원 진학을 고려하고 있었다.

한국에서 몇 군데에 지원서를 넣고 인터뷰 약속을 잡았어요. 하지만 ‘DAI’라는 학교에서 그곳의 한국인 유학생을 만났는데, 로테르담에 있는 ‘피에 츠바르트(Piet Zwart)’ 학교를 추천해 주셨어요. 그날 무작정 로테르담으로 갔지만, 방학이라 모든 문이 닫혀있었어요. 그런데 뒷문을 열어보니 문이 움직이는 거에요. 일단 들어갔어요. 문이 많은 좁은 복도가 나왔고 화장실을 찾아 들어갔어요. 보라색 조명이 아주 묘한 곳이었어요. 결국 그 학교가 저와 인연이 닿았어요. .

그곳에서의 생활은 어떠셨나요?

학교보다 레지던시에 가까웠던 곳이었어요. 순수 미술을 공부했어요. 층고가 높은 큰 스튜디오를 세 명이 공동으로 사용했고 과제를 하는 기분보다 작업하는 기분으로 생활했어요.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었고요. 다양한 국적의 교수와 학생들은 모국어가 아닌 영어로 대화를 해야 하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부분은 작업으로 채워 이해하려고 했어요. 있는 그대로를 봐주려고 하는 것들이 좋았죠.

어쩌면 네덜란드에서의 경험이 PSR을 만들게 된 계기가 되었을 수도 있겠네요.

지금 생각해보면 호사를 누린 기분이에요. 졸업 작품으로 만들었던 <상상음식 도감> , 네덜란드에 가기 위해 준비하는 시간 동안 친구들과 함께 작업했던 <안경점>. 그리고 다시 학교 생활. 이 모든 것이 연결되는 기분이에요. 작업의 맥락을 스스로 깨닫는 거에요. 유학 생활을 하면서 이것이 최종 목표가 아니라는 것을 느꼈어요. 그렇지만 과정 때문에 하게 된 모든 일은 좋았어요. 앞날을 모르고 했지만 그래도 그때의 기억이 참 좋아요.

한국으로 돌아온 박세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제품을 만들겠다는 의지를 갖고 PSR을 브랜드화했다. 시간이 쌓일수록 전달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다양해지고, 동시에 깊어지고 있다. 그녀는 주로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요소를 작업으로 끌어들인다. 저녁 식탁에 올라왔던 음식의 재료가 새로운 작업의 재료가 되는 식이다. 그것은 앞치마가 될 수도 있고, 접시가 될 수도 있고, 가방 혹은 생활용품이 될 수도 있다. 재료들은 박세라가 진두지휘하는 요지경의 이야기 속에서 주인공이 되기 위해 준비하고 있을 뿐이다.

일상에서 재미있는 것들이 불쑥 말을 걸 때 행복하잖아요. 그것이 아주 작은 것이라고 할지라도요. 예를 들면, 식빵 접시 같은 것들이요. 식빵이 그려져 있는 작은 접시 위에 달걀 부침이 무심히 담겨 있는 사진을 봤었거든요.

재미있는 것을 좋아해요. 어떤 상대와 있느냐에 따라 조금씩 바뀌지만요. 진지할 때는 심각하게 진지하고, 어느 순간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오면 정신없이 신이 나요. 작업할 때 재미있게 하면 결과물을 보는 사람들도 재미있어 해요. 가볍게 했던 것들이 반응이 더 좋을 때가 있어요. 최근에는 이야기보다 이미지로 설명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블로그에 조르주 페렉이 말한 ‘일상의 사회학’에 대한 구절을 적어놓으셨죠. 저변에 있는 것, 일상의 하부, 배경음을 포착하려는 것에 대한 이야기였는데요. 이것은 PSR의 작업과 연결되는 지점이 있어요. 그래서 작업의 주재료가 쉽게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음식일 수 있다고 생각했고요.

음식은 단순하게 생각하면 그것이 가진 색, 모양, 구조가 독특해요. (접시 위의 연한 민트색 빵을 가리키며) 이 빵만 봐도 색이 예쁘잖아요. (종이컵을 가리키며) 이런 사물보다는 훨씬 매력적으로 다가와요. 어떤 재료를 그려야겠다고 다짐하고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지금 먹고 있는 것 혹은 보고 있는 것 중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것을 연구하는 거에요. 그런데 생각해보면 일상에서 영향을 받지 않는 작가가 있을까 싶어요.

작업실의 한쪽에는 최근 연구를 시작한 가지와 두부, 파인애플을 수학적으로 풀어 놓은 것들이 있었다.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종이 위에 그려져 있는 것들이 음식의 재료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분석적이었다. 재료의 단면은 기본이고 여러 각도에서 관찰한 모습, 다양한 방법으로 분해한 것의 결과가 기록되어 있었다.

분석할 재료가 정해지면 집중적으로 파고들어 가는 건가요?

실물을 직접 잘라봐야 방향이 생겨요. 잘랐는데 방향이 보이지 않는 재료도 있고요. 최근 시작한 작업은 ‘도형음식’이 주제에요. 예를 들어, 가지를 변형시키면 평행사변형이 만들어져요. 파인애플은 팔각기둥 혹은 사다리꼴 정도가 될 수 있겠고요. 이런 식으로 접근해야 작업이 이뤄져요. 초등학교 수학 선생님이 학생들을 위해 만들어놓은 수업 자료가 가장 많은 도움이 되요. 두부의 운명은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요. 며칠째 같은 자리에 있어요. 어려워요.

그런데 밑지로 발라두신 건 테이프인가요?

종이테이프 같은 것인데 의료용 반창고에요. 어머니가 간호사로 일하고 계셔서 이 재료를 쉽게 접할 수 있었어요. 종이에 물감으로 채색하면 항상 세다는 느낌이 있었어요. 그런데 이 테이프를 위에 붙이면 마음이 편안해져요. 색을 한 번 덮어주는 느낌이랄까. 네덜란드에도 챙겨가서 사용했는데, 어떤 것을 치유하려는 의도가 있었냐고 물어보더라고요.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을 핵심어로 사용할 수 있지 않을까 해요. 끊임없이 생각하고 반영하는 거에요.

의도하지 않았어도 접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공통으로 느끼는 부분이 있는 것 같아요. 제가 보는 PSR의 물건에도 치유의 이미지가 있거든요. 외로울 때 찾게 되는 것들이랄까요. 포근하게 안아줄 것 같은 팔이 그려져 있는 베개, 편히 잘 수 있게 눈을 가려주는 손이 그려져 있는 안대는 특히 더 그래요.

그랬다면 성공이에요. 이런 성공은 상업적인 것과 다른 영역에 있어요. 안대를 만들 때 구글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어요. 모르는 사람을 만나기 전에 구글을 통해 그 사람에 대해 검색을 하면 아주 상세하게 정보가 나온다는 거에요. 무섭잖아요. 넘치는 이미지나 정보를 차라리 보지 않는 것이 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눈을 가린다는 의미를 두기도 했고요. 내뱉기는 쉽잖아요. 그런 것에 휘둘리지 않으려면 모르는 것이 낫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야심차게 만들었었지만… (웃음)

모든 과정을 혼자 해결하시는데, 기획하고 제작하고 판매하는 과정에서 언제 가장 고된가요?

판매요. (웃음) PSR을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작업의 의미가 클지라도 누군가에게는 아무것도 아닐 수 있어요. 현실과 이상의 차이를 깨닫고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어요. 어쩌면 이상적인 생각일 수 있어요. 제품을 만들고 나면 항상 두 가지 감정이 교차하거든요. 허망함과 슬픔.

박세라가 말하는 허망함과 슬픔의 느낌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기에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대신 그 감정에 대해 박세라는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했다.

며칠 전 친구에게 계속 거절을 당하니 슬프다고 문자를 보냈어요.

거절이요? 어떤 거절이요?

뭔가에 지원했는데 떨어졌다던가, 약속을 했는데 그 약속이 취소됐다던가. 이 모든 것이 어떻게 보면 거절이잖아요. 하여간 거절을 당해 슬프다고 하니 친구가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에요. 슬픈 이유를 아니까 괜찮은 거라고요. 그래서 생각해봤어요. 왜 허무한 감정이 생기는지. 제품을 만드는 과정은 신이 나요. 자료 조사를 하고 활발하게 시장 곳곳을 뛰어다니고요. 그런데 완성된 제품을 받으면 아쉬움이 생기는 거에요. 항상 같은 제품을 만들지 않으니까 아쉬움도 또 새로 생겨나요.

박세라는 재미있는 일화를 이야기할 때면 정말 그 당시로 돌아간 듯 생생하게 표정이 밝아졌다. 그런 그녀가 많은 사람에게 전달하고 싶은 최종의 이야기는 무엇인지 궁금했다. 그런데 그녀의 대답은 마치 지금까지의 대화는 잊어도 괜찮다고 말하는 듯 다시 새롭게 이어졌다.

저는 계속해서 ‘메시지 제품’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어요. 그런데 이미지로 해결되는 것들이 있죠. 의미를 알아봐 주지 않아도 되고 알 필요도 없다고 생각해요. 누군가는 식탁보로 사용하는 것을 다른 누군가는 벽에 걸어 놓을 수도 있고요. 제가 만든 것을 단지 보는 것만으로도 즐겁게 느낀다면 성공한 것으로 생각해요.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든.

그녀의 웃음소리는 독특하다. 호탕하게 내뱉는 웃음과 안으로 삼키는 웃음의 미묘한 경계에 있는 소리를 갖고 있다. 그녀의 물건도 웃음소리와 비슷하다. 곁에 두고 쓰면 박장대소와 미소의 사이를 경험할 수 있다. 그간의 삶이 외로웠다면 위로의 한 숟갈은 덤으로 얻을 것이다. 그녀는 물건의 소중함을 아는 사람이다. 화려한 형태와 비싼 가격에 상관없이 자신을 치유해 줄 수 있는 물건의 상징성에 대해 아는 사람이다. 그녀가 만들고 있는 물건이 누군가에게 중요한 역할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박세라 자신에게 있었다.


글 이원희 · 사진 김규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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