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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당장 누군가 비닐이 필요하다고 하면 나는 주방 서랍이나 비닐을 모아놓는 통을 뒤질 것이다. 족히 열 장 이상은 줄 수 있다. 비닐을 제공하고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을 것이다. 비닐은 그런 존재다. 심지어 집안 곳곳에서 사용 중인 비닐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남은 식재료를 감싸 안고 추운 냉장고 안에 있거나 냄새나는 쓰레기통 속에서 온갖 쓰레기를 끌어안고 있다.
비닐은 누구에게나 관대하지만, 쉽게 버려진다. 이런 비닐을 선택한 사람은 김태연이다. 비닐만큼 가뿐하고, 비닐만큼 모든 것을 받아줄 것 같은 비닐 같은 사람. 비닐의 사생활이자 김태연의 사생활이 태연백 안에 한가득 들어있었다.
태피스트리 작업을 오래 하셨죠.
네, 십 년 넘게 했죠.
태피스트리도 직조의 한 방식이라고 하면 이해가 빠를까요?
그렇죠. 직조는 경사와 위사가 둘 다 드러나면서 짜이기도 하는데 태피스트리는 실을 걸어놓은 경사는 보이지 않고 위사로만 표현되는 기법이에요. 더 촘촘하고, 시간이 오래 걸려요. 직조는 실만 걸어 놓으면 속도를 낼 수 있지만, 태피스트리는 짜는 자체가 오래 걸려요. 직조는 패턴을 만들어내는 것에 좀 더 적합하고, 태피스트리는 자유로운 표현, 회화적인 표현이 가능하다는 장단점이 있어요.
대학에서 섬유 미술을 공부한 그녀의 태피스트리 작업을 사진으로 찾아봤다. 주로 개인적인 이야기가 담긴 수필 같았다. 갑작스러웠던 이별, 모든 걸 비워내고 싶었던 순간의 기록이었다. 마치 슬펐던 일도, 허전했던 마음도 실로 메꾼 것 같았다. 그리고 지금의 김태연은 누구보다 경쾌하게 작업하는 것처럼 보였다.
예전에 하셨던 태피스트리가 장편의 이야기라면 지금 하고 계신 작업은 단편의 시작 같아요. 비닐을 사용하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비닐을 사용하게 된 것은 나만의 실을 찾기 위해서였어요. 태피스트리도 굉장히 다양해요. 구조적이고 입체적인 형태의 작업도 있고, 사진처럼 섬세한 것도 있고요. 이미 기술적으로 완벽한 작업들이 많은데 나의 태피스트리는 어떻게 돋보일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어요. 특히 실을 구매할 때 같은 공장에서 생산됐음에도 저마다 미묘하게 색이 다른 것도 불만이었고요. 많은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실이 아닌 것으로 실을 만들어보자는 것이었죠. 그리고 여러가지 시도를 해보면서 비닐의 가능성을 알게 되었어요.
작업실 한쪽에 독특한 실타래가 있었다. 한 가지 색이 아닌 여러 가지 색이 규칙 없이 섞여 있는 것처럼 보였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비닐이었다. 비닐로 만든 실이었다.
저기 있는 실들은 비닐을 최대한 가늘게 만들어보자는 마음으로 한 거에요. 다시는 안 할 거에요. (웃음) 심지어 재봉틀에서 사용할 수 있어요. 실로 만들 때 매듭을 지으면서 했기 때문에 윗실로는 부적합하고 밑실로 사용하면 잘 되더라고요. 그런데 다시는 안 해요. (웃음)
비닐로 만든 실을 보고 벌어진 입은 김태연의 소재개발 책자에서 더 크게 벌어졌다. 그 안에는 가로, 세로 3cm 정도 크기의 소재 견본이 스크랩되어 있었다. 물론 모두 비닐과 비닐실로 만든 것이다. 스트라이프와 체크를 비롯해 독특한 문양들이 눈에 띄었다. 두툼한 책자로 기록된 김태연의 실험에서 그녀의 집요함을 봤다. 김태연과 비닐, 둘만의 비밀 세계 같았다.
서로 다른 비닐을 사용했을 뿐인데 자연스럽게 문양이 생기네요.
이 작업을 하면서 비닐이 색상도 다양하고, 재질도 다양하고, 재미있는 소재라는 것을 느꼈어요. 그리고 비닐을 모으기 시작했죠. 혼자 모으다 보니 매번 구매하는 물건은 비슷하고, 모이는 비닐도 비슷한 거에요. 그래서 주변 분들에게 부탁했어요. 버리는 비닐을 모아서 달라고 하면서 꽃 그림도 그려서 달라고요. 그렇게 모은 비닐로 실을 만들어 짜고, 꽃 그림도 만들어 넣어 전시하고, 비닐을 주신 분들께도 보여드렸어요. 다들 놀라시더라고요.
그렇다면 비닐로 가방을 만들 생각은 어떻게 하셨어요?
애써서 비닐로 실을 만들어 짰는데 아무도 비닐인걸 모르는 거에요. 독특한 실이겠거니 정도로만 봤죠. 나중에는 비닐인 걸 알아줬으면 했어요. 그래서 비닐로 만든 실을 다시 직물로 만들어서 비닐 형태로 만들었는데 같은 반응이었어요. 그때부터 비닐의 형태를 살릴 수 있는 작업을 했고, 비닐 위에 박음질을 했어요. 비닐이 워낙 얇으니까 방향을 무작위로 바꿔가면서 박음질을 하니까 재밌는 거에요. 형태가 우스꽝스럽기도 했고요. 가방을 만들기 위해 시작한 것은 아니었지만, 여러 시도 끝에 지금의 가방이 나오게 되었어요.
가방은 매일 드는 물건이고, 누군가에게는 실용적이어야 하는 물건이잖아요. 그런데 이런 물건의 주재료를 비닐로 선택하셨다는 것에 놀랐어요. 비닐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은 확실하니까요.
특히 검정 비닐은 더 그렇죠. 누군가 물건을 담아야 할 때 비닐을 건네면 차라리 손으로 들고 가겠다는 편이 많거든요. 작업을 하면서 알게 되었어요. 제 눈에는 비닐이 정말 예뻐요. 제 고정관념이 깨진 것처럼 다른 사람도 같이 느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초창기 가방은 지금의 태연백과 조금 다른 모습이었다. 내구성을 위해 추가된 안감, 타이백이나 실용성을 위해 추가된 안주머니가 없는 순수 비닐 가방이었다. 오로지 비닐 몇 장과 그 위를 지나다니는 실만 있었다.
비닐 자체로만 봉제할 때 생기는 우연이 있어요. 장력이 안 맞아서 생기는 엉킴 같은 것들이요. 저는 그런 우연을 좋아하지만, 상품으로 구매하시는 분들은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으니까요.
취향의 차이겠죠. 비닐로만 만들었던 초창기 가방을 찾으시는 분들도 있을 테고요.
비닐로만 만들었을 때는 안감이 있었으면 좋겠고, 안감이 생기니 주머니도 있었으면 좋겠고, 내구성을 위해 비닐 자체에 타이벡이라는 질긴 소재도 덧대게 되고. 그렇게 만들고 나니 막상 처음에 만들었던 그 느낌이 좋다는 분들도 계시는 거에요. 아무래도 쉽게 비교할 수 있으니까요.
재료도 쉽게 구할 수 있고, 재봉틀을 다룰 수 있는 기술이 있는 사람이라면 얼마든지 비슷하게 만들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런 것에 대한 걱정은 없으신가요?
벌써 어디선가 만들고 있을지도 모르죠. (웃음) 걱정이 없진 않아요. 경제력과 생산력이 있는 사람이 대량 생산한다면 정말 할 수 없죠. 알고 지내던 사람이 비닐로 실을 만들어서 직조 작업을 시작하는 걸 봤어요. 물론 비닐이 독점으로 사용할 수 있는 재료도 아니고, 이미 발표된 비슷한 느낌의 작업도 많아요. 제가 최초로 개발한 것이 아니에요. 그런데 그 사람의 시작점이 불편했어요. 당시에는 화도 많이 났고, 특허나 디자인 등록에 대한 고민도 많이 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어요. 누구든 비슷하게 만들고, 따라 해도 상관없어요. 저는 계속 새로운 방식을 찾을 것이고, 지금 이곳에만 머물러 있지 않을 거니까요.
김태연의 말은 쫀득쫀득했다. 적당히 질긴 비닐의 느낌이랄까. 비닐에 대한 확고한 애정이 확신으로 바뀌고, 그 확신은 태연백을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신뢰가 되었다. 들면 들수록 빳빳했던 소재는 부드러워지고, 사용하는 사람의 습관에 따라 모양도 조금씩 잡혀간다. 그동안 발견하지 못했던 비닐의 숨겨진 면은 보이는 것보다 많았다.
비닐은 색을 어떻게 중첩하느냐에 따라 느낌이 달라져요. 어떤 색을 어떤 순서로 겹치느냐에 따라 달라지고, 덧대는 장수에 따라 달라져요. 심지어 같은 색 비닐 위에 다른 색 실을 봉제할 때 그 느낌은 또 다르고요. 정말 재밌어요. 재밌는 아이들이에요.
편견, 고정관념, 이면. 그녀와 대화를 나누는 동안 가장 많이 언급되었던 단어들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과 그래서 놓치는 것들에 대해 항상 주시하는 모습이었다. 이런 모습이 모든 작업을 하나로 연결해주고 있었다.
잔디도 다 자라지 않은 초봄에 있었던 일이에요. 오랜만에 혼자 집에 있던 날이에요. 뜨겁게 커피를 끓이고 바깥을 보는데 까치가 총총 걸어 다니는 거에요. ‘날씨가 좋은 날 유유히 산책하는군.’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 생각이 끝나기 무섭게 누구 마음대로 까치의 상황을 판단하는 것인지 스스로 물어봤어요. 먹이를 찾기 위해 헤매고 있는 상황일 수 있잖아요. 그때 느꼈죠. 비닐뿐만 아니라 어떤 상황, 대상, 관계 안에서 내가 보지 못한 것 혹은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것이 얼마나 많을까. 그런 마음을 어떻게 작업에 담아낼 수 있을까. 결국,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그것의 가치가 달라질 수 있는 거에요. 그리고 그 마음을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었고요.
태피스트리도 계속 하실거죠?
최근에 다시 짜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실을 짤 때 주로 무슨 생각을 하셨어요?
별의별 생각 다 해요. 일상적인 것, 억울했던 일, 실수했던 일, 오늘 저녁은 뭘 먹지, 내일은 뭐 하지. 라디오 들으면서 할 때는 혼자 웃기도 하고.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아무 생각이 없어요. 그 순간엔 몰라요. 몰입이라는 것이 순식간에 빠져들었다가 나도 모르게 다시 나오는 것 같아요. 어떨 때는 그런 시간을 갖고 싶어서 일부러 앉아있기도 해요.
태연백을 통해 꼭 전달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요.
섬유는 사람과 아주 밀접한 존재잖아요. 그런데 섬유라는 단어 뒤에 ‘미술’, ‘공예’라는 단어가 붙으면 굉장히 멀게 느껴요. 태피스트리 작업을 하다가 물건을 만들게 된 것도 어떻게 보면 나의 가까운 가족, 친구들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출발한 거에요. 단순히 벽에 걸려있는 작품을 눈으로만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즐길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가방도 그렇게 만들고 싶고, 작품도 그렇게 만들고 싶어요.
그녀의 비닐을 만져보고, 어깨에 걸쳐보고, 모자처럼 머리에 얹어 놓기도 했다. (모자를 만들면 좋을 법한 둥근 형태의 비닐 작업이었다.)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한 잔의 차와 커피를 마시고, 빈대떡을 나눠 먹었다. 다른 때보다 엉덩이가 무거워졌음을 느꼈다. 많은 일회용품의 존재가 고마울 때도 있지만, 하찮을 때가 더 많다. 아니 아예 신경 쓰지 않을 때가 더 많다. 좀 더 다르게 보는 것, 좀 더 주의깊게 보는 것. 김태연은 그렇게 비닐을 봤고, 다뤘다. 누구든 오랫동안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을 만들겠다는 그녀의 신중한 마음을 안아주고 싶다.
글 이원희 · 사진 김규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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