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운철의 운우, 당신을 치유하는 작은 조각들

양운철은 자투리 진흙으로 ‘운우’라는 친구를 빚는다. 왜 친구를 빚는가? 그가 아팠기 때문이다. 왜 아팠는가? 그가 작가이자 전시기획자였기 때문이다. 작가이자 전시기획자라고 해서 아픈가? 아니다. 그가 가난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가난한 작가이자 전시기획자는 아파야 하는가? 그럴 리 없다. 가난하지만 즐겁게 작업하는 작가들도 있을 것이고, 능글능글하고 피둥피둥하게 세상을 버텨내는 전시기획자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양운철은 아팠다. 그리고 그것이 그의 잘못은 아니다. 그는 당신이나 나처럼, 그저 좀 여리고 예민한 사람이었을 뿐이다.

운우는 양운철의 다른 이름이다. 그리고 그가 만들어낸 수많은 그의 분신, 또는 친구들의 이름이다. 양운철은 조형작가이자 전시기획자다. 그래서 작가로서는 운우라는 이름으로, 기획자로서는 양운철로 활동하고 있다. 양운철은 전시를 하고, 글을 쓰고, 그릇을 빚고, 사진을 찍는다. 가진 게 없는 사람이 예술의 길에 섰을 때, 그 길은 평탄하고 쾌적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 길을 벗어날 생각이 없다. 그저 가난한 아티스트로서 웃으며 살아갈 뿐이다. 예술을 시작하게 된 계기도, 멈춰야 할 이유도 딱히 없다. 그러니 후회나 미련이 끼어들 이유도 없다.

가난하다는 것은 어느 정도의 굴욕을 견뎌야 하는 일이다. 양운철은 미술계에서 주어지는 작은 일거리를 하며 고단한 삶을 이어왔다. 양운철은 그 동네의 여러 지점을 가로질렀고, 많은 것들을 보았다. 아름다움과 진실함을 만들기 위해서는 때로 추한 일들이 필요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그는 약한 사람이었다. 양운철은 견디지 못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는 공황장애를 얻었고, 그 병이 근래 일어난 몇 번의 일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가 이 삶을 포기하지 않는 한, 이 병은 언제나 그에게 숨어있게 될 것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갑자기 돈 많은 작가나 전시기획자가 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바꿀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신밖에 없었다.

의사를 찾아가 약을 얻는 대신, 호흡곤란이 올 때마다 마음으로 몸을 다스리려고 노력하는 방법을 택했다. 일반적으로 공황장애 발작이 났을 때 환자가 겪는 공포는 사형을 앞둔 사형수의 그것보다 훨씬 크다고 알려져 있다. 양운철은 맨몸으로 공포와 싸웠다. 난 지금 몸이 아픈 게 아냐. 양운철은 자신에게 주문을 걸며, 마음이 아플 때 어떻게 자신의 마음을 치유해야 하는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양운철은 그렇게 자신을 내려놓는 법을 알아가게 되었다. 우리는 모래알처럼 작고 약하다. 하지만 우리를 괴롭히는 세속적인 문제들은 무겁고 두렵다. 하지만 모래알과 같은 인간들을 계속 살아가게 하는 거대한 자연의 힘도 있을 것이다. 자신을 들여다보면서 치유할수록, 자연과의 관계를 탐색하던 작업의 힘도 조금씩 강해졌다.

몸과 마음을 다스리는 데 조금 익숙해질 무렵, 양운철은 장애인예술문화운동 단체인 에이블아트에서 서포터를 모집한다는 공고를 보았다. 하나의 매체에 국한되기보다는 최대한 다양한 매체를 다루도록 교육하는 학교에서 미술을 전공했던 터라서, 그는 회화와 도자 수업에 동시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그 교실에서 양운철은 불편한 이들이 오히려 불안해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불안해하지 않기 때문에 마음으로 서로를 공격하거나 상처입힐 일도 적었다.

양운철은 학교를 떠난 후 오랜만에 만난 흙이 반갑고 좋았다. 손으로 흙을 만졌을 때 흙이 움직여 쉽게 모양을 바꾸는 그 순간 저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학생들을 돕는 동안 항상 조금씩의 흙을 손에 쥐고 다니다가, 쉬는 시간 같은 때 순식간에 학생들의 책상에 작은 ‘모양’을 툭툭 올려놓아 그들을 재미있게 해주곤 했다. 드디어 학기가 끝날 즈음 가마에 학생들의 작품이 올려졌고, 양운철도 여기 저기 남는 공간에 그 ‘모양들’을 함께 넣어 구워냈다. 유약을 얹어 색을 입힌 그 조각들이 과연 무엇으로 태어나게 될지 두근두근했다. 기다리는 시간이 지난 후, 양운철은 가마의 열기를 버텨낸 그 조각들이 마치 생명체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양운철은 그들에게 자신과 같은 ‘운우’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자신의 친구로 삼기로 마음먹었다.

양운철은 틈이 날 때마다 운우를 만들었다. 만들어진 운우를 손으로 만지작거리다보면 화염을 버텨낸 진흙 조각의 온화한 기운이 흘러들어오는 듯했다. 하지만 여러 개를 만들지는 못했다. 양운철에게는 공방에 정식으로 등록할 돈이 없었다. 운우는 남들이 쓰다 남은 흙으로도 충분히 만들어낼 수 있을 만큼 작았고, 가마에 넣을 때도 그릇과 그릇의 틈새에 올려두면 되어서 아무도 그에게 핀잔을 주지 않았다. 오히려 운우의 따뜻함과 동글동글함이 무척 마음에 들게 된 공방 사람들은, 도자 작업도 해보라며 양운철의 어깨를 떠밀었다. 양운철은 조금 당황했다. 오랜 세월 도자 작업을 해오신 분들이 만드시는 그릇은 만들 수 없겠지만, 그래도 나만의 그릇은 있을 거야, 그렇게 생각하며 그릇을 만들기 시작했다. 나는 그것이 꽤 용감한 시도였다고 생각한다. 양운철이 만든 그릇은 마치 오랜 시간 바닷물에 닳고 씻겨진 물건처럼 보인다.

사실 운우들 역시 어떻게 보면 바닷가의 몽돌을 닮았다. 아마도 양운철은 운우를 만들면서 즐거워했을 것이다. 어린아이들은 자연을 바라보며 무언가 독특한 것을 발견하곤 한다. 아이들은 구름과 돌, 빗방울을 보면서 토끼나 코끼리, 나비와 무지개를 상상하는 것이다. 약하고 아픈 양운철이 즐겁게 만든 운우에는, 그런 독특하고 유쾌한 느낌이 배어 있다.

“그건 흙이었기 때문이에요” 양운철은 말했다. 흙은 따뜻하다. 그리고 자연을 상징하는 가장 흔하디흔한 사물이기도 하다. 양운철은 따뜻한 흙을 만지면서 마음을 내려놓았고, 나아가 마음을 비우게 되었다. 양운철은 지금까지 겪었던 많은 힘든 일들이 지나간 후에도,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는 자신의 에너지를 믿는다. 그리고 자신이 지닌 모든 힘을 모두 다 운우들에게 불어넣어주고 싶어했다. 너만은 정말 아름다운 모습으로 세상을 살아가렴, 약한 양운철은 그런 심정으로 운우 하나하나를 빚었다.

양운철은 운우를 ‘친구’라고 부른다. 양운철은 이 친구들이 자신을 치유했던 것처럼, 다른 이들도 조금쯤 치유해 주기를 바란다. 슬플 때 운우를 손에 쥐고 있는 것은 꽤 괜찮은 일이다. 당신의 체온으로 데워진 운우는, 다시 당신의 손을 따뜻하게 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손이 따뜻해지면 마음도 약간은 따뜻해지지 않을까. 양운철은 그런 작은 희망을 가지고 운우를 빚어 가마에 넣는다.


글 이정혜 · 사진 김규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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