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림, 불량 양말 재생 프로젝트

양말 신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발에 열이 많아 유독 갑갑하게 느껴지는 탓이다. 언제부터 그 놈의 ‘발足열(?)’ 현상이 있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엄마가 신겨놓은 레이스 양말을 몰래 벗어놓고 유치원에 가거나, 눈 내리는 한겨울에도 맨발에 슬리퍼만 질질 끌고 심부름을 나가기 일쑤였으니 오래전부터 양말 신기를 좋아하지 않았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시간이 흘러 사회생활을 할 만큼 나이가 찬 지금도 양말 신기는 ‘공공예절’을 지키기 위한 의례일 뿐이다. 사실 외출하고 돌아오자마자 가장 먼저 벗어 던질 만큼 양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양말 구경’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패턴과 색감이 뛰어난 양말은 무작정 사고 싶고, 발이 아닌 손에 자꾸 끼워 들여다보게 된다. 만듦새가 훌륭한 양말은 무엇보다 원단의 촉감이 포근하고 질이 좋다. 곱게 자르고 손으로 꿰매 무언가를 만들고 싶어질 만큼. 포장 비닐을 뜯어 한 번만 신어도 금세 궁상맞게 변하는 길거리표 양말과 달리 화려하고 아름다운 패턴을 뽐내는 좋은 양말은, 여러 번 빨아도 멋진 자태를 오래 유지할 만큼 실용성도 좋다.

그러므로 양말로 인형을 만드는 박정림은 행운아다. 질은 좋지만 사소한 흠 때문에 안타깝게 불량 판정을 받은 양말을 지원받아 마음껏 자르고 붙이는 작업을 할 수 있으니 말이다. 아름다운 불량 양말은 박정림의 양말 인형 ‘삭스플리즈’ 의 멋진 재료가 된다.

양말 공장 1년이면 풍월을 읊는다

그렇다면 그녀는 어쩌다 양말로 인형을 만드는 삶을 살게 되었을까. 대학도 졸업하기 전에 박정림이 취직한 곳은 양말 회사 삭스타즈였다. 삭스타즈는 국내외 알려지지 않은 소위 ‘죽이는’ 브랜드 양말을 골라내 수입해 소개하고, 자체 제작도 하는 일종의 작은 양말 공장(?)이자 수입상이었다. 박정림은 이곳의 창립 멤버였다. 당시 직원은 그녀를 포함하여 다섯 명. 젊은 중소기업 특유의 자유분방함이 자연스럽게 연상되는 삭스타즈에서 그녀가 맡은 업무는 일러스트레이션이였다. 양말 공장에 취직한 일러스트레이터라니.

창업 당시 삭스타즈가 추구한 홍보 방법은 스토리텔링이었어요. 삭스타즈 캐릭터의 입을 빌려 회사 이야기를 들려주는 방식을 고려하고 있었는데 제 대학 때 전공이 영화 애니메이션이었거든요. 대표님과는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알고 간간히 연락해 오던 사이었는데 이 일을 할 사람이 필요하던 차에 제가 생각나서 연락하셨던 거고요.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양말과 별다른 관계가 없던 한 사람이 양말 회사에 취직했고, ‘펭귄’과 ‘소년’을 주인공으로 양말 만드는 일에 관한 이야기를 만들게 된 것. 불행인지 다행인지 펭귄과 소년의 양말 만드는 이야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회사가 홍보 방향을 바꾸면서 홈페이지에 블로그 형식으로 업데이트했던 스토리텔링 홍보도 함께 중단되었던 거였다. 일의 포지션이 애매해진 박정림에게 회사가 먼저 제안했던 게 바로 양말 인형 만들기였다.

평소 손바느질을 좋아하고 즐겨했기 때문에 삭스타즈에 취직하면서 ‘삭몽키’(양말을 꿰매 원숭이 인형을 만드는 것)가 떠올라 검색을 해 본 적이 있어요.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생소하지만 외국에서는 구멍이 나 더 이상 신지 못하는 양말을 잘라 붙이고 솜을 넣어 삭몽키를 만드는 게 그리 낯설지 않거든요. 언젠가 회사에서 가볍게 삭몽키에 대해 얘기했고, 한번 만들어 보라는 제의에 양말 인형 만들기가 시작되었어요.

양말 회사니 버리는 양말이야 충분했다. 생산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나오게 되는 1%의 불량 양말. 판매하지 못하고 그냥 버릴 바에 인형으로 만들어보는 것도 나쁠 것 없었다. 멋들어진 패턴에 활기찬 색감을 뽐내는 불량 양말이 한데 쌓였다. 취업 후 양말만 보다보니 양말의 종류는 물론, 패턴과 촉감, 조직의 특징은 이미 익숙했다. 그야말로 양말 인형을 만들기에는 최적의 조건이었다.

회사 한 켠, 가장 늦게 불이 꺼지는 그녀의 작업 공간

불량 양말 한 켤레. 한 짝은 인형의 몸이 되고 다른 한 짝은 팔과 꼬리가 된다. 양말의 앞 쪽은 널따란 머리, 그리고 발의 뒤꿈치는 볼록한 엉덩이로 탄생한다. 폭신한 솜으로 말캉거리는 삭몽키를 두 손으로 쥐었다. 그리고 양말의 처음 형태를 찾아가며 그녀가 한 땀 한 땀 바느질 하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재단하고, 꿰매고, 솜 넣고, 눈과 코, 입까지 만들어 주고나면 보통 3시간이 훌쩍 흘러요. 그것도 폴리에스테르가 섞인 맨들맨들한 양말의 경우고, 복잡한 패턴이 들어간 양말은 시간이 더 걸리죠. 뒤집으면 수많은 실이 엉켜진 모양이 보이거든요. 그 위에 펜으로 줄을 긋고 재단을 하려면 일이 더 까다로워질 수밖에 없어요. 그리고 패턴이 복잡할수록 솜 때문에 부피가 늘어난 양말 조직 사이로 안쪽 실이 보여 지저분해져서 패턴에 따라 계산하면서 만들어야 하거든요.

세상에 쉬운 일 하나 없다. 양말 인형 하나 만드는 것조차 그러하다. 하루 종일 자르고 꿰매며 양말에 매달려 얻을 수 있는 삭몽키는 두세 개. 좋은 재료가 나오는 날엔 자진해서 야근까지 하며 인형을 만드는 데 폭 빠졌다. 양말 본래의 패턴을 이용해 인형을 만드는 일이 이렇게 재미있을 줄 몰랐다. 기계로는 표현할 수 없는 손바느질 특유의 우글우글한 느낌도 좋았다. 그래도 그렇지 그냥 한번 만들어 보라는 말에 다른 일 다 제쳐두고 인형을 만드는 직원이라니. 모르긴 몰라도 사장님 속 좀 태우지 않았을까?

도리어 회사에 피해될까 제가 그만두겠다고 했어요. 회사에서는 삭몽키를 기부사업으로 진행하려 했었기 때문에 정당한 ‘업무’로 봐 주셨거든요. 삭스타즈 홈페이지에서 판매된 삭몽키의 수익금을 기부하는 방식에서 나아가, 이주노동자나 독거노인에게 인형 만드는 일을 의뢰해서 작업비를 드리는 방식의 기부 프로젝트를 구상했었어요. 하지만 이 프로젝트가 회사의 주된 사업이 아니라서 간간이 주어지는 다른 업무도 맡아야 했어요. 하지만 양말 인형 때문에 일의 진행이 늦어져서 회사에 부담을 주는 게 싫어 사직서를 냈죠. 무엇보다 양말 인형에 매달리고 싶은 마음이 워낙 간절했고요.

그러니까 우연에 우연을 거듭하며 도달한 양말 인형 만들기가 어느새 그녀에게는 ‘간절한’ 일이 되어버렸다는 이야기다. 인생이란 얼마나 알 수 없는 일인가. 회사는 그녀의 독립을 지지했고, 회사 한 켠 작은 공간과 불량 양말을 지원하며 삭스플리즈의 건투를 빌어주는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사직서를 낸 회사에 새 출근을 하게 된 박정림은 삭몽키 말고도 새로운 양말 인형을 디자인하기 시작했다.

양말 인형을 처음 본 사람들은 일단 냄새부터 맡아봐요. 양말이라는 단어 때문인지 새 양말임에도 불구하고 왠지 찝찝해 한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때 느꼈던 건 ‘그래, 차라리 맡을 거면 좋은 향을 넣자’는 거였어요. 그렇게 만들어진 게 라벤더 포푸리를 넣은 작은 열쇠고리 형 양말 인형이었고요. 

‘반전이 있는’ 양말 인형이 탄생한 것이다.

그렇게 삭스플리즈라는 이름으로 독립을 선언한 박정림은 박람회에서 삭몽키를 포함한 다양한 종류의 양말 인형을 판매한 수익의 일정부분을 월드비전에 후원한다. 그리고 제품을 구매하는 사람에게 이 인형 구매로 후원을 받을 아이의 모습이 그려진 배지를 함께 전달한다.

양말 인형의 키덜트 감성을 노린다

나는 한때 브라이스 인형에 정신을 못 차리던 시절이 있었다. 자기 몸의 세 배는 되는 큰 머리 탓에 지지대 없이는 혼자 설 수도 없는, 그러니까 지극히 일반적인 미적 기준에서 결코 예쁘다고 할 수 없는 어른을 위한 인형. 그 요물이 묘한 매력을 빌미로 내 지갑을 탈탈 털어갔다. 인형을 사고, 입힐 옷을 사고, 꾸밀 액세서리를 사고, 소비는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다 큰 어른이 인형 가지고 논다는 비난이 한낱 소귀에 경 읽기였던 건 내 자신이 ‘인형 놀이’로 진정한 즐거움을 느끼고 있어서였다. 박정림이 추구하는 지점도 바로 이거다. 어른을 위한 양말 인형.

양말 인형의 경우 말랑거리고 포근한 특유의 물성과 촉감 때문에 기본적으로 어린 자녀를 둔 엄마들에게 인기가 높아요. 사실 지금까지 흔히 보아오던 양말 인형 디자인은 피규어나 구체관절인형, 그리고 건담 등 키덜트가 열광하는 아이템 하고는 거리가 멀죠. 그런데 카네이테이와 함께 딱 한 번 진행했던 콜라보레이션을 통해 어른을 위한 양말 인형의 가능성을 확인했어요.

섹스 어필을 슬로건으로 양말에 징을 박거나 과감한 프린트를 넣는 양말 브랜드 카네이테이와의 콜라보레이션에서 그녀는 유쾌하면서도 적당히 불량스러운 삭몽키를 만들었다. 손바느질로 약에 취한 듯 풀린 눈, 귀여운 성기도 그려 넣었다. 좀 더 어른스러운 이 작업에 대한 긍정적인 피드백은 박정림에게 키덜트를 위한 양말 인형 디자인이라는 도전 과제를 던져주었다. 콜라보레이션이 끝난 후에도 박정림은 멈추지 않는다. 양말 인형의 새로운 세계로 나간다.

앞으로는 옷과 신발, 가발 등의 아이템까지 만들어 보려고 해요. 양말 인형을 구매하는 순간의 매력뿐만 아니라 아이템을 활용해서 변화를 주며 ‘놀 수’ 있게 되는 거죠. 양말 인형의 반전매력이랄까요?


글 우해미 · 사진 김규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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