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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 시간이 지난 늦은 저녁, 서울에서 가장 짧은 길이의 도로라는 소공로에 들어선다. 도심에서 보기 힘든 묘한 모습의 낡은 건물들이 줄지어 서 있고, 촘촘히 박힌 타일 벽면이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일제 강점기에 경성부청과 조선은행을 연결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소공로는 남촌의 새로운 문물을 북촌으로 유입하는 통로였다고 한다. 그 소공로를 따라 찾아간 곳은 ‘코우너스’다. 코우너스는 작은 인쇄소이자 출판사이고, 또한 그래픽 디자인 스튜디오이다.
어두컴컴한 건물 안의 가파른 계단을 올라 사무실 문을 열자, 한 켠에 리소 인쇄기가 놓여있다.
늦게까지 일하시네요.
보통 열한 시부터 여덟 시까지 일하는데 요즘은 좀 늦게까지 있어요.
인쇄만 맡기는 분들도 많이 있나 봐요.
네. 카드, 엽서. 달력을 할 때도 있고.
계단을 올라오다 보니 마사지 집이 있어서 깜짝 놀랐어요.
이상한 마사지 집은 아니에요. 이 동네에서 제일 오래된 곳이래요.
조용한 사람들. 군더더기 없는 대답만 한다.
코우너스라는 이름은 어떻게 지은 건가요?
저희는 엠엠엠지에서 인턴을 할 때 만났는데, 그때 얘기가 무척 잘 통했어요. 그러다가 책이나 뭔가를 같이 만들자는 얘기를 했고, 그때 나온 주제가 ‘코너’였어요. 남성복 코너도 있고, 과자 코너도 있고, 여기저기 구석구석 코너들이 있잖아요. 코너라는 걸 주제로 하면 시리즈로 펴낼 수 있고, 다양한 이야기를 꺼낼 수 있다는 생각도 들었죠. 그런데 책을 만들려고 보니 인쇄를 전혀 모르기도 했고, 더구나 옵셋은 접근이 좀 어려웠어요. 그때 생각난 게 리소였어요. 알아보니 중고가 있길래 프린터를 구한 다음, 처음에 생각하던 ‘코너’라는 책에서 이름을 따서 ‘코우너스’라고 지었지요.
여기서 잠깐, 리소가 뭔지 궁금하실 수도 있겠다. 코우너스에서 뗄 수 없는 부분은 바로 리소그래프(Risohgraph)이다. 리소 인쇄기는 본래 저렴한 대량 복사를 목적으로 개발된 네트워크 디지털 인쇄기인데, 저해상도의 공판 인쇄 방식으로 주로 단색이나 2색을 지원한다. 코우너스는 리소 단색기를 응용한 다양한 프린트 작업으로 사람들에게 이름이 알려졌다.
아하! 그러면 그 책을 만드셨나요?
아직요. 하하하.
안 만드셨다는 책이 바로 그거로군요. 정말 나오게 된다면 재미있겠어요.
네, 내년에 나올 거 같아요. 작년에도 내년이라고 그랬지만.
소공로에는 어떻게 들어오게 되었나요?
‘코너’라는 책을 만들려고 모여서 작업실을 알아보던 차에 인욱 아저씨가 북창동에 작업실을 하나 작게 얻어놓으셨는데, 그걸 계속 안 쓰고 계셨어요. 그래서 저희가 임대료 반을 내고 들어갔죠. 인쇄기 하나 놓고, 다리 네 개씩 사서 책상 세 개를 만들었어요. 그렇게 서너달 인욱 아저씨랑 같이 쓰다가 인욱 아저씨가 다른 곳으로 가셨고, 계속 그곳에 있다가 이곳으로 옮겼어요. 그 공간은 여기의 1/4정도밖에 안 될 정도로 엄청 작았거든요. 그래도 처음에는 살만 했었는데 화장실이 좀 안 좋고, 춥고, 덥고. 더군다나 주변에 오래된 건물이 많다 보니 불이 많이 났어요. 그래서 옮기게 되었죠.
그들이 ‘인욱 아저씨’라 부르는 정인욱 씨는 스스로를 소프트머신(Soft Machine)이라 부르는 수리 전문가. 코우너스를 비롯한 작은 스튜디오나 디자인 회사의 내부 공사에 참여해 디테일을 조정하는데 능한 분이다.
인쇄, 출판, 그래픽 디자인, 세 가지로 나뉘어 있는데, 모두 수익을 내면서 운영이 되고 있나요?
출판 쪽은 수익을 내려고 하는 건 아니에요. 저희가 내고 싶은 책이나 같이 작업하고 싶은 작가들과 하는 일이죠. 재미, 흥미 위주로 하는 거라서 보통 크게 수익이 되진 않아요.
그렇다면 주된 수익원은 그래픽디자인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일의 분담은 어떻게 하시나요?
그때그때 분담하고, 아이디어 회의를 해요. 연락을 하시는 분들이 포트폴리오를 보고, 예를 들어 어떤 그림이나 스타일이 맘에 든다 하시면, 그 작업을 했던 사람이 주된 일을 맡아서 진행을 하고, 아이디어 같은 건 같이 얘기를 하고 그래요. 혼자 하면 의견을 모으거나 피드백을 받을 사람이 없잖아요. 만족도도 떨어지고요. 물론 혼자일 때 편한 부분도 확실히 있는데, 프로젝트마다 좀 다른 것 같아요. 또 개인이 각자가 알아서 진행하는 책 같은 것도 있어요. 그런 건 의견을 공유하고, 자기가 하고 싶은 범위 안에서는 하고 싶은 걸 하고 있어요.
정확함보다는 여유로움, 계획보다는 우연, 결과보다는 과정의 묘미를 찾아내려고 느린 발걸음을 옮기는 사람들.
처음에야 의욕도 넘치고 추진력을 내기도 쉽죠. 그런데 성장의 단계마다 조직의 문제도 새롭게 생겨나는 것 같아요. 코우너스는 2년이 채 안 됐는데, 어떤가요?
처음에 시작할 땐 자금 같은 게 하나도 없었어요. 지인의 디자인 숍에서 아르바이트도 꽤 오래 했고요. 그거로 임대료를 냈어요. 그때와 비교하면 지금은 저희가 계획했던 것보다 더 많은 월급을 받고 있죠. 물론 앞날에 대한 걱정은 계속되고, 불안하긴 해요. 그래도 계속하다 보면 괜찮아지지 않을까 생각해요. 걱정은 되지만 어쩔 수 없잖아요.
그러면 직원을 더 늘려서 규모를 확장하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저희는 이걸 수익 때문에 보다는 아직까지도 재미 때문에 하고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나중에도 계속 이걸 할 거 같아요. 인쇄라는 게 재미있잖아요. 그것을 대규모로 공장을 돌려서 하는 것보다는 소소하게 만들어서 하는 게 더 의미가 있는 것 같아요. 그러다가 나이가 들면 관심사가 달라질 수도 있죠. 그 나이대에 처한 관심사나 흥미를 같이 공유해가면서 작업하면 더 의미도 있고 재미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따라서 규모를 키운다기보다는 다양한 방법으로 만들 수 있는, 어떤 규모에 딱 뭔가를 두고 있다기보다는 그런 변화를 생각하면서 일하고 있어요.
그들이 가장 소중히 사용하는 도구인 리소 인쇄기. 그것에 대해 조금 더 물어보았다.
일반 인쇄랑 다른 리소의 특징은 뭔가요?
인쇄된 결과물의 특징은 마스타 인쇄랑 비슷하다고 보면 돼요. 마스터 용지를 쓰고, 교회 주보나 봉투 인쇄에 많이 써요. 그런데 저희가 사용하는 방식은 이 인쇄기 드럼의 색상이 여러 가지가 있어요. 드럼이 있고 거기 들어가는 잉크가 있는데, 이걸 별색이라고 생각하면 될 거 같아요. CMYK로 만들어낸 색상이 아니라, 별색을 하나씩 찍어서 다른 색감을 볼 수 있는 거죠. 색상은 정해진 색상이 열 몇 가지가 있고, 섞어서 뭔가를 만들고 싶다고 요청을 하면 비용을 만들어주기도 해요. 다만 대량이 아니다 보니 가격이 비싸죠.
요즘 3D 프린터와 같은 기기들은 가격이 계속 낮아지면서 일반인들도 살 수 있게 되었잖아요. 리소도 그런가요?
아예 없어지는 추세인 것 같아요. 외국에서는 디자인 스튜디오에서 이걸 다양하게 많이 활용하지만, 한국에서는 리소 코리아에서 교회 주보용으로 공급하는 정도거든요. 잉크도 주로 검정이나 파랑만 쓰고. 저희가 이걸 구매해서 다른 컬러를 주문했었는데 컬러를 쓰는 곳이 저희밖에 없는 거에요. 기계를 이런 용도로 사용하는 곳도 한국에서는 서너 군데 정도로 많지는 않아요. 아무래도 리소 인쇄기가 일반 디지털이나 옵셋보다는 해상도 면에서 현저하게 떨어지니까요.
그렇다면 일부러 이렇게 할 이유는 없는 거네요?
네. 그런데 작은 그래픽 디자인 스튜디오에서 사용하기는 좋은 이유가 글씨는 잘 나오거든요. 그래서 작은 책자라든지 그런 걸 만들기엔 괜찮은 방법일 수 있어요.
외부에서는 코우너스를 어떻게 볼 것 같나요?
작다?
제가 코우너스를 소개하고 싶었던 이유는 그 과정이 재미있어서였어요. 일종의 주문 인쇄소랄까, 흥미로운 그래픽 디자인의 배경을 갖고 있는 인쇄소라고 생각했어요.
대형 인쇄소는 대형 인쇄소만의 한계가 있고, 저희는 저희대로의 한계가 있는 것 같아요.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건 이런 옵셋을 원하는데, 우리가 리소로 그걸 똑같이 할 수는 없죠. 이런 건 어떻게 하는 것이 좋다는, 그리고 리소로 하는 건 이런 결과물이 나온다는 설득을 할 수는 있을 거예요.
리소라는 한계를 알고 있는 상태에서의 주문 인쇄는 가능한 거라고 보면 되겠네요.
네. 저희는 인쇄도 하는 디자인 스튜디오니까요.
인터뷰를 마치고 묵묵히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는 그들의 모습은 그 자체로 하나의 리소 인쇄기 같았다. 리소 인쇄가 정확한 결과물을 대량으로 한번에 찍어내는 것이 아니라 조금은 헐렁한 기계를 통해 하나씩 색을 중첩시켜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코우너스라는 스튜디오를 만들어 함께 일하고 의견을 조율하고, 일정한 계획에 따르기보다는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판단하며 그들만의 길을 걸어갈 것이다. 엉성해보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예측하지 못했던 흥미와 온기를 담아내는 그들의 내일은 어떤 모습일까?
편집자 주: 인터뷰 당시에는 김대웅, 조효준, 김은혜, 세 명의 동업자였지만, 지금은 김은혜 씨가 독립해서 김대웅, 조효준 두 사람이 스튜디오를 꾸려나가고 있습니다.
글 최윤호 · 사진 김규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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