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근하게 소소하게, 옻칠의 재발견: 강희정

옻칠(漆)은 옻나무 수액으로 만든 천연도료이다. 15년 이상 자란 옻나무에 상처를 내면 나무 스스로 치유를 위해 만들어내는데, 100일에 걸쳐 채취하는 양이 종이컵으로 한 컵이 채 못 된다고 하니 귀하디귀한 고급재료이다. 동아시아에서는 기원전부터 사용했다는 칠이고, 방수와 방부 기능이 있어서 제대로만 잘 발라 놓으면 천년만년이 간다는 옻이다. 1500년 전 고구려 벽화나 700여 년 전의 팔만대장경이 그림과 글을, 색과 먹을 잘 보존할 수 있었던 이유도 이 옻칠 때문이란다.

그래서인지 옻칠에선 그 역사만큼이나 묵직한 깊이가 느껴지고, 수염 허옇게 기른 지긋한 장인이나 대가의 거작이 연상된다. 하지만 그런 옻칠의 세계에도 젊고 경쾌하며 아주 현대적인 시도가 있다는 것은 반가운 소식이다. 도시락과 젓가락에, 목걸이에 옻칠로 멋을 내 새로운 감각을 보여주는 강희정의 작업실을 찾았다.

어쩌다가, 왜 옻인가요? 

대학에서 공예를 전공했어요. 대학 때는 보통 칠 대용인 캐슈로 작업을 하지요. 그러다가 대학원에서 처음 옻을 가지고 작업을 했는데, 옻칠이 그냥 재미있었어요. 어떤 다른 재료와도 만날 수 있고, 또 여러 번 반복하면서 칠하는 것 자체가 좋아요. 옻은 다루기가 만만하지 않은데, 그래서 오히려 더 재미있지요. 산소와 접하면서 색이 달라지기도 하고, 상온에서는 건조가 안 돼요. 적절한 온도랑 습기를 항상 유지해야 하거든요. 옻칠은 민감하다고 해야 할까, 지루하지 않고요, 살아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반려동물이나 화초를 키우고 돌보는 것처럼 말인가요? 

네, 맞아요. 옻은 나무에서 나오는 옻산이라는 성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건조장에 들어가면 색이 죽었다가 확 다시 피어나지요. 그 모습을 지켜보면 살아있는 생명력을 느껴요. 하지만 한번 건조가 안 되면 한 달 이상 걸리기도 하지요. 그런 기다림과 돌봄의 과정을 통해서 옻칠이 완성되는 겁니다. 

나무는 아무것도 바르지 않으면 1년도 버티지 못하고 뒤틀리고 만다. 화학성 도료를 바르면 뒤틀리는 건 막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나무는 숨을 쉴 수가 없게 된다. 그러니까 옻칠은 뿌리 없는 나무에 숨통을 틔우고, 그 나무와 함께 공생을 모색하면서 영생을 꿈꾸는 묘약인 것이다. (옻나무 순은 봄철 두릅을 제치고 으뜸으로 손꼽히는 봄나물이고, 그마저도 독성분 때문에 어린 새순이 나오고 딱 3일만 허락된다 한다. 옻이 오르는 것도 알고 보면 결국 독과 약의 경계를 타는 일이니 과연 옻은 신비한 이력의 소유자이다.) 

재료비도 비싸고, 한번 칠하면 5~6시간이 지나야 다시 칠을 할 수 있기 때문에 기다려야 하고, 그래서 옻칠 작업은 이 시대랑 안 맞는다고들 이야기합니다. 사람들에게 이 작업의 지난함을 납득시키기도 힘들지요. 그래서 저는 공정을 조금 단순화시켜 보았어요. 전통 장인들이 예닐곱 번 칠을 반복한다면 저는 3~4회 정도 칠해요. 

그래서일까요. 전통적인 옻칠공예와는 다른 현대적이면서 세련된 느낌이 강해요. 대중이 좋아하는 게 뭔지 알고 있다는 생각도 들고요. 깔끔한 대사와 상큼한 배우들이 등장하는 미니시리즈 같은 느낌이지요. 

심플한 게 좋아요. 언제 어디서나 잘 어울리고 과하지 않게 만들려고 애쓰죠. 무심한 듯 살짝만 신경써주는 거예요. 특별히 의도한 것은 아닌데, 제가 좋아하는 스타일이 반영된 것 같아요. 일상의 소품들이나 그릇 같은 걸 즐겨 보러 다니거든요. 그러면서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이 점점 확실해지고, 대중이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도 이해하기 시작했는지도 모르겠어요. 그러고 보니 고등학교 때 별명이 ‘은근녀’였어요.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은근히 뭔가 하고 있다는 뜻이라는데…. 

작업대 위에 놓인 도시락이며 젓가락, 수저 받침대는 그녀의 말처럼 은근하고 군더더기 하나 없는 채로 말을 아낀다. 과장하거나 너스레를 떨지 못하는 그녀의 물건들은 수줍은 듯 무심한 듯, 만든 이 자신을 닮아있다. 그런 그녀가 애써 입을 열어 도시락 뚜껑을 만져보라고 내민다. 예상 밖으로 뚜껑마다 느낌이 달랐다. 

옻이 다른 재질과 만나도 완성된 제품에서는 원재료가 무엇이었는지 구분이 안 돼요. 대부분 그 차이는 과정에서만 알 수 있어요. 전통적으로 가구를 만들 때는 나무 표면에 삼베를 한번 붙이고 나서 칠을 했어요. 나중에 칠이 들뜨고 뒤틀리지 않도록 하는 거지요. 과거엔 그 베를 안 보이도록 칠했는데, 오히려 베의 느낌을 살렸더니 칠이 무거워 보이지 않고 편안해지더군요. 그런 식으로 다양한 질감을 살려봤어요. 옻칠만 한 경우는 아주 매끄럽지요. 숯가루나 흙을 섞어서 오돌토돌 거친 질감을 내기도 하고요. 그렇게 과정이나 재료를 겉으로 드러내 보이는 방법을 찾아본 거지요. 

그리고 흔히들 옻은 검게만 칠해지는 줄 아는데, 물감처럼 어떤 색이든 다채롭게 표현 가능해요. 액상인 생칠에 가루 안료를 더해서 작업을 하지요. 도자나 금속은 칠을 한 후 구워야 하고요. 그래야 접착이 되고 칠이 살이 오르게 됩니다. 어찌 보면 칠 하나로 다양한 작업이 가능한 거지요. 

사용자 입장에서 옻칠 제품이 좋은 점은 어떤 건가요? 

사실 뭐가 좋은지 그걸 말로 표현하긴 쉽지 않아요. 써봐야 알 수 있지요. 그것도 오래오래 쓰면서 길들여 가면서 느껴야 하는 거고요. 일반적으로 방충, 방습, 방부 기능이 있어서 물로 씻을 수 있고, 나무는 거의 썩지 않는다고 해요. 화학도료들도 일정 정도 그런 기능을 하지만 옻은 천연성분이기 때문에 몸에 해롭지가 않죠. 옻이 오르면 고통스럽지만 약에 쓰이기도 하잖아요. 

옻에 오른 적도 있나요? 

처음엔 온몸에 옻이 올랐어요. 지금도 물론 오르고요. 큰 작업을 하면 온몸에 오르고 보통은 손과 손목 정도에 발진이 생기거나 가려운 정도예요. 하지만 두려움은 완전히 없어진 상태라고 할 수 있어요. 

가볍고 편안해 보이는 작업의 배후엔 은근히 강인한 여성의 힘이 있었던 것일까. 그러고 보니 도시락과 젓가락은 밥상에 오르는 물건이고, 밥심은 아무래도 여성으로부터 유래하지 않는가. 거기에 수저받침을 목걸이로 삼아 밥하는 여성에 존경을 표하면서도 유머감까지 발휘하는 건 은근히 노련한 한수가 아닌가. 하지만 아쉬운 것은 그녀의 재미난 레퍼토리가 아직은 여기까지라는 사실. 

그녀 스스로도 말한 것처럼 새로운, 없었던 아이템을 만드는 것은 쉽지 않고, 자발적인 동력이 생기는 게 좀처럼 쉽지 않다는 것. 많은 사람들이 그녀가 만든 물건들을 써보고, 또 누군가가 이런 걸 좀 만들어보라고 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하지만 이제 곧 10년째가 되는 그녀의 옻칠 작업이 한번쯤은 뛰어오르기를 바라면서 은근한 그녀의 힘, 밥심을 기대해 보면 안 되려나. 


글 백현주 · 사진 김규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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