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튜디오 블랭크, 지친 당신에게 말을 건네고 싶다

반듯한 얼굴에 검은 안경테 너머의 선한 눈이 인상적이다. 쉬이 말을 뱉지 않을 입매에서는 침착함이 느껴진다.

김재진이 걸어온 궤적은 보통의 디자이너와 그리 다르지 않다. 국민대학교 공업디자인학과를 졸업한 뒤 휴대폰과 타이어 회사에서 디자이너로 일했다. 누구나 알만한 디자인 컨설팅 회사를 2년 동안 다니기도 했다. 하지만 2012년 3월, 다시는 회사에 들어가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고 회사를 나왔다. ‘수명을 단축하면서까지’ 디자인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시작을 함께한 사람은 초등학교 때 만난 오랜 벗 변재홍이다.

2011년부터 둘이 야심차게 준비했던 첫 제품은 나무 안마봉 ‘타피(TAPI)’였다. 얼핏 봐도 효자손 비슷한 거라고 하기에는 꽤 멋지다. 안마봉의 매끈한 곡선 덕분에 손에 잘 잡혀서 좋다. 물건을 사는 이들이 조금 나아지고 건강해지기를 바라며, 스튜디오 블랭크는 피로에 지친 현대인들을 위한 나무로 된 생활 도구를 만들고 있다.

친구와 함께하는 디자인

스튜디오는 어떻게 만드시게 됐나요? 

친구 변재홍과 함께 만들었어요. 제일 친한 친구였는데, 일본에서 공부를 했어요. 서로 다른 길을 걷다가 재홍이가 부모님을 뵈러 한국에 들어왔을 때 같이 일하자고 제안했어요. 그렇게 시작했어요. 재홍이는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친구죠. 저와 성격이 달랐어요. 전 조용하고 내성적인데, 재홍이는 활달하고 친구도 많고 키도 훤칠하고 그랬죠. 경험이 많은 친구죠. 

두 분의 역할은 어떻게 되나요? 

제가 제품을 기획하면, 재홍이가 생산, 즉 매니지먼트를 해요. 기업에서는 설계와 마케팅하시는 분들이 계시지만, 여기선 우리가 모든 걸 알아서 해야 하죠. 제품 하나를 만들기까지 수많은 시행착오도 있고, 재료에서부터 업체 선정까지 모든 과정을 일일이 겪어야 하는 상황이죠. 회사에서 일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경험이에요. 

서른 중반, 누구나 안정을 추구할 나이에 김재진은 홀로서기를 감행했다. 변재홍은 친구의 제안 한 마디에 무작정 서울로 올라왔다. 주변 사람들은 격려했지만, 이들의 무모함에 놀라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무모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세심하고 부지런하다. 홀로서기를 한 지금의 기획과 만들기는 학교와 회사에서의 그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지금의 일에는 이전보다 훨씬 많은 신경이 쓰이고 노력이 필요하다. 처음에는 ‘막 저질렀’지만 차츰 경험이 쌓이다보니 움직이기가 더 어렵다. 김재진은 “그렇다고 도전적인 시도를 안 할 수는 없지요”라고 덧붙인다. 

스튜디오를 시작한 건 2011년이었어요. 당시 저는 회사를 다녔고, 다음해 3월에 회사를 나왔어요. 운 좋게 서울디자인페스티벌을 시작으로 아름다운 재단이 주관하는 <<우리시대 멘토 100인의 응원메시지>> 전에 참여했어요. 디자인 전시에 많이 참가했는데 전시비용이 비싸서 매장을 만드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결국 인사동 쌈지길에 쇼룸을 열게 되었죠. 

어깨 통증에 시달리는 디자이너가 만든 안마봉

왜 안마봉을 만드셨나요? 

건강에 대한 관심이 유달리 컸었던 것 같아요. 매일 컴퓨터 앞에 앉아 있다보니 어깨가 아프더라고요. 한번은 어깨를 학교 다닐 때 조명 만들었던 틀로 두들기는데 정말 시원한 거예요. 그때 컴퓨터 옆에 두고 쓸 수 있는 안마봉이 있으면 좋겠다 싶었죠. 제가 워낙 목이 안 좋기도 해서요. 

어렸을 때 몸이 약하셨나요? 

그건 아닌데… 

김재진은 부모님이 건강원을 하셨어요, 라고 말하면서 웃었다. 사실 부모님의 건강원을 브랜드화해볼까 고민한 적도 있다. 디자이너는 밤샘을 해야 하고, 책상 앞에 앉아 있어야만 한다. 몸이 좋아질 리 없다. 한편으로 건강에 대한 관심이 커진 것은 그 때문이기도 하다. 

수능 때도 밤샌 적이 없는데, 회사에서 밤새우느라 힘들었어요. 그런 경험을 하고 나니 제가 어디로 가야 하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죠. 전 디자인을 오래 하고 싶은 사람인데, 이런 상태로는 얼마 못하겠다 싶더라고요. 수명을 단축시키면서까지 디자인을 하고 싶지는 않았어요. 제가 좋아하는 디자인을 오래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죠. 

우리만 포기하지 않으면, 계속 만들 수 있는 물건

왜 나무인가요? 

나무라는 재료에 관심이 있었다기보다는 그 크기의 금형을 만들 돈이 충분치 않았어요. 금형 파는데 비용이 만만치 않거든요. 물론 안마봉이 플라스틱이면 좀 아닌 것 같기도 했고요. 아이템을 정할 때 가장 중요했던 것은 제가 잘 다룰 수 있는 소재여야만 했던 거죠. 제 돈, 제 월급을 들여서 작업을 해야 하니 작지만 제품화할 수 있는 재료와 형태를 찾기 시작했죠. 안마봉 타피는 나무토막을 손으로 잡고 칼을 대고 회전시켜서 지금의 모양으로 깎을 수 있는 거예요. 신기했죠. 나무는 일반적으로 대량생산이 안 된다고 여기는데, 이 모양은 가능한 거죠. 처음에는 손으로 깎았기 때문에 모양이 다 달랐어요. 

손으로 깎는데 얼마나 걸리나요? 

첫 전시에 백 개를 내놨는데, 일주일이면 충분했어요. 하루에 2~30개 만들었던 것 같아요. 

김재진은 이 모든 일의 시작을 가능케 해준 타피에 가장 애착을 갖는다. 그만한 디자인이 아직까지 없다고 말하는 것은 타피가 그만큼 오랜 시간 공들여 만든 제품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 일을 오래 할 수 있겠다는 희망을 준 고마운 물건이다. 타피의 모양새는 아주 ‘트렌디’하거나 ‘스타일리쉬’하지는 않다. 대신 나를 위해 언제나 변함없이 있어 줄 친구와 같은 느낌이다. 나이가 들어도 우리가 만들 수 있는 물건이었어요. 그게 즐거웠던 것 같아요. 우리만 포기하지 않으면, 계속 만들 수 있고, 팔 수 있다는 거. 오랫동안 사람들이 쓸 수 있는 물건이라는 거.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싶어요

최근 스튜디오 블랭크는 레이저 각인기를 구입했다. 2013년 12월, 쌈지길 쇼룸을 정리하고 새로운 마음으로 새 아이템을 개발하는 중이다. 쇼룸을 연 지 9개월만의 결정이었다. 쇼룸 곳곳에는 김재진, 변재홍의 섬세한 손길이 묻어있다. 쇼룸을 열고나니 오히려 같이 있을 시간조차 없게 됐다며, 무엇보다 같이 있는 게 중요하죠. 김재진은 그간의 아쉬움을 내비쳤다. 

기성품을 사더라도 자신의 마음이 담긴 그림이나 글을 넣어서 선물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온라인에서 그런 서비스를 한 적이 있는데, 사람들의 반응이 좋았던 것 같아요. 다들 특별한 선물을 해주고 싶은 마음을 갖고 있는 거죠. 타피에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아서 작업하려고 해요. 

자신이 만든 제품들을 사용하나요? 

목침이 세 개나 있어요. 말씀드렸듯이 제가 목이 안 좋아서, 은연중에 욕심을 내서 개발하게 된 것 같아요. 최근에 만든 것은 땅콩 베개예요. 근데 종아리나 허리 마사지에 더 좋아요. 

자신에게 힐링은 무엇인가요? 

사람을 만나는 게 힐링이에요. 사람이 중요한 것 같아요. 어떤 일을 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 일을 가능하게 도와주는 사람들도 있고. 저한테는 그게 중요해요. 디자인이 기능적으로 힐링을 할 수 있지만, 좋은 사람을 만나서 좋은 디자인을 하는 게 저한테는 힐링이죠. 그리고 친구와 계속 이 사업을 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죠. 이제 삼년차가 되었어요. 힘들긴 하지만 웬만해서는 접지는 않을 거예요. 회사를 그만둘 때는 다시 들어가려고 하지 않았으니까요. 이게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해요. 가고 싶은 데도 없고, 제 일 하니까 마음이 제일 편하죠. 

나는 이렇게 우직하고 성실한 디자이너를 최근에 본 적이 있을까. 조곤조곤하게 내뱉는 김재진의 말은 얼핏 평범하게 들리는 듯한데, 곱씹게 만드는 묵직함을 갖고 있다. 그 속에는 자신의 제품을 포장하기 위한 유려한 말솜씨도 없다. 디자이너가 갖고 있을 법한 욕심과 자만도 없다. 
상업적인 비즈니스를 하려면 트렌디를 무시할 수 없을 텐데도 김재진은 그저 오래 쓸 수 있는 물건들을 만들겠다고 한다. 어쩌면 이것이 초등학교 시절에 만난 친구들과 가장 가깝게 지낸다는 그에게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르겠다. 일회적인 제품들을 마구 찍어내는 회사에서 벗어난 김재진은, 자신이 용납할 수 있는 디자인을 해나가고 싶을 뿐이다.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자기한테 꼭 맞는 가죽 재킷을 찾는 일은 일생을 걸어도 쉽지 않다. 평생 쓸 수 있는 물건을 고른다는 것은 평생 친구를 만나는 것과 비슷할 것이다. 스튜디오 블랭크의 제품을 다이소와 대형마트의 생활용품과 비교한다면 가격이 당연히 비쌀 수 있다. 하지만 천 원, 이천 원에 몇 번 쓰고 다시 바꿀 제품보다 오랫동안 자기 곁에 두고 쓸 물건을 찾는다면 이들의 물건을 권하고 싶다.

상상해보자. 책상 위에 놓인 안마봉 타피는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한 순간을 묵묵히 기다릴 것이다. 그러다 야근이 찾아오는 날이면 어김없이 자신의 매끈한 허리를 내어주겠지. 때로는 어깨 위로, 때로는 종아리 아래로. 내 곁에서 내 몸을 토닥거려주는 든든한 친구로서 말이다. 


글 구정연 · 사진 김규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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